세상과 ‘나’를 바꾸는 정성스런 일,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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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담을 읽다보면 여성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가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난제와 마주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곡식을 줍거나 까는 일이 있다. 예컨대 모래밭에 흩어진 쌀을 주워 껍질을 까거나 뒤섞여있는 곡식을 주워 따로 담는 일 따위다.
콩쥐는 계모의 명령에 따라 볍씨를 까야했고, 자청비도 넓은 밭에 뿌려진 좁쌀을 모두 주워야 했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프시케 역시 시어머니인 비너스가 밀, 좁쌀, 겨자씨 등 섞어 놓은 곡식을 종류별로 가려 놓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곡식을 줍거나 까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는 것이 무의미하고 무기력해서 아무런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필자가 만난 여성들 중 상당수가 가사에 몰입하기 힘들다고 호소한다. 주부의 일상은 매우 사소하고 반복적인 작은 일들의 조합이라 할 수도 있다. 큰 일, 밖으로 잘 드러나는 일은 누구나 하고 싶어 하고 성과가 금세 보이기 때문에 성취감을 느끼기 쉽다. 하지만 작은 일, 보이지 않는 일, 해도 티가 나지 않는 일은 스스로를 낮추지 않으면 할 수 없다.
특히 사상과 관념, 또는 추상 세계에 관심이 많은 여성들에게 집안일은 어쩌면 고문일수도 있다. 먹기 싫은 밥을 억지로 먹어야 하는 고통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재미가 없으면 의미라도 있다면 하겠다는 살림을 억지로 또는 후다닥 ‘해치우기’는 쉽지만 ‘정성스럽게’ 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만약 살림이 자신의 본성을 살리고 인격을 확장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이 복잡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어질러진 물건을 치우고, 가족의 고단함을 쉬게 해주는 공간을 ‘정상화’시키는 일이라면?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와 지치고 허기진 가족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매일 따뜻한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어쩌면 성스럽기까지 하다. 집안일은 화려하지도 드러나지도 않지만 사랑이 없다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중용>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여성성을 가치 없는 것으로 폄하하지 않을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여성성’은 그 근원이 ‘모성성’이며 모성적인 것이란 생명을 품어 키우고 낳고 돌보며 지지와 성장을 촉진하는 내용을 갖고 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치유와 성장을 돕는 여성의 본성을 살리는 태도다.
그런 태도가 결국 프시케가 남편 에로스를 다시 만나게 했고 콩쥐와 자청비가 역경을 딛고 자주적인 여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저력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작은 일처럼 보이는 집안일에 정성을 다할 때 가족들은 생활의 온기를 느끼고 삶의 안정감이라는 쉽게 얻기 힘든 큰 선물을 갖게 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에게 헌신하는 그 일이 엄밀한 의미에서 자신을 위한 일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형이상학의 세계로 빠져들 때, 마음의 때를 벗기듯 생활의 때를 벗기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 것은 어떨까? 살림은 균형을 잡는 일이다. 얼핏 반복적이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그 일은 위대한 사고와 일상의 소박한 삶 사이, 공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을 잡아 ‘지금’에 충실하도록 도와주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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