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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인형과 양철로봇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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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서영심리상담센터
댓글 0건 조회 19회 작성일 25-02-0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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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인형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상담실로 들어왔다. 마치 플로리다 해변에서 썬탠을 하고 온 듯 잘 그을린 피부에 긴 팔다리, 큼직한 이목구비가 단번에 눈길을 끈다. 게다가 상냥한 태도와 친절이 온 몸에 배어있어 어떤 사연이 있는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인내는 어릴 때부터 그녀에게 당연한 것이었고 어느덧 체화되었다. 그 덕에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었다. 싸움이 끊이지 않던 그녀의 집안은 불행하고 삭막했지만 그럴수록 더 밝게 웃으며 아무도 자신의 슬픔을 눈치 채지 못하게 무한 긍정모드로 살아왔다. “나만 참으면, 나만 잘하면 다 잘 될 거야. 내가 우리 가족과 내 친구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돼”라며. 그러는 동안 그녀의 슬픔은 점점 깊고 큰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요즘 함께 살고 있는 남자의 눈치를 보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긴장을 풀지 못한다. 남자에게 지적이라도 당하는 날은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들어 자책에 빠지곤 했다. 체중도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참는 것에 익숙해진 그녀는 바비인형 같은 존재였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보다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기로 설정된, 아니 스스로 설정해버린. 그런데 요즘은 종종 긍정모드로의 전환이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불안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때가 많다.



양철로봇


남자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가 양철로봇으로 느껴졌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는 그의 가족사, 그리고 계모의 학대를 견디기 위해 그가 만들었을 차가운 금속외피가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어떠한 질문과 개입에도 감정적인 것은 그 외피를 통과해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했다. 학대받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의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마치 남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잘 버텨내며 맨주먹으로 자수성가했다. 하지만 심리적인 성장은 어느 순간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정을 갖고 있었다면 어떻게 그 모진 순간들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견딜 수 있었겠는가.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잘 봉인하고 살아온 양철로봇이었다.


문제는 성인이 된 지금은 감정을 느끼면서 살아가도 좋으련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좋은 곳에 가도 좋은 줄 모르겠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을 한다는 건 외계어 해석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그가 봉착한 어려움은 자신이 품은 연애감정이 너무 쉽게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담을 시작했는데, 상담이 거듭되면서 자신의 피상적인 ‘관계 맺기’ 때문에 진실한 관계를 유지하고 성숙시키지 못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나름 자기 변화를 꾀하며 여성이라는 존재를 알아가려고 애썼다. 그에게는 전에 없던 노력이었다.



만남과 헤어짐


그러던 어느 날 술을 마신 여자가 취했는지 감춰두었던 속마음이 울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 외롭다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낯선 행동과 표정 변화를 감당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여자가 여전히 불행해 한다며 분노하기까지 했다. 남자는 불안했다. 여자와 맺고 있던 관계에 자신감이 떨어지면서 아무리 애써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다 포기하고 싶어졌다. 자신에게 웃음을 주어야할 바비인형이 울고 있는 것을 양철로봇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는 가면을 쓴 채 살고 있었다. 여자의 가면은 ‘보은’을 위해 만든 것이고, 남자가 쓴 가면은 ‘자존심’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남자가 여자의 빚을 청산해 준 것이 암묵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정말 고마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하는 마음은 의무감으로 남았다. 남자는 여자를 끝까지 보살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봐 조바심 내며 버티고 있었다. 이들은 빚 대리 청산이 자신들의 관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둘 다 처음에는 사랑이라고 착각했지만 동등하지 않은 관계는 사랑으로의 진입을 어렵게 만들었다.

여자는 자신이 노력하고 맞춰주면 다 잘 될 거라 생각했고, 남자는 여자와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자신에게만 맞추는 여자에게 더 이상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제대로 된 관계를 경험한 적이 없는 그는 관계에서 오는 좌절감을 이겨낼 만한 확신이나 힘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관계란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 서로의 차이를 배우고 알아가면서 조율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 앞에서 자신이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없다면, 서로의 차이를 알아채고 인정하고 간극을 좁혀나가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자신들이 처한 불균형 상태를 받아들이고 서로가 동등해질 수 있도록 상대를 도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심스럽게 제대로 된 ‘관계 맺기’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진짜 만남


간혹 여자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가슴이 저려왔으나 한편으로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보던 모습이라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슬픔조차 타인이 지켜보는 모습을 의식하면서 표현하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않고 어딘가 연기하는 것처럼 비쳐졌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신이 남들에게 바비인형처럼 기쁨을 주는 존재로 살아왔음을 인정해야 ‘진짜 만남’을 가질 수 있다. 바비인형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픈 과거를 수용하고 위로하면서 말이다. 그런 후 앞으로 주어질 삶에서 자신이 예쁘기만 한 인형으로 살아갈지, 아니면 인간적인 모습을 때때로 드러내는 보통 사람으로 살아갈지 선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의 기쁨과 자신의 행복이 등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아야 한다.


남자는 좀 더 어려운 과제를 풀어야 한다. 그 역시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양철로봇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결과, 남들로부터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내적인 면에서 누락된 인격의 요소를 발견할 기회는 없었다. 이제 연인과의 만남이 깨지더라도 그 경험을 통해 진짜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 봉인되어있던 마음을 연다는 것은 엄청난 두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해낸다면 한겨울 숲속의 딸기처럼 귀하고 생생한 인생의 맛을 경험할 수도 있다.


바비인형과 양철로봇의 관계가 계속 유지될지는 상대의 문제를 들추며 비난하기를 멈추고 해결되지 않은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있는가에 달려있다. ‘너무 이상한 저 사람’을 연구하는 대신 ‘언제나 옳았던 나’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면 그건 정말 좋은 출발이 될 수 있다. 나를 제대로 만나고 알아가야 자신과 맞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 맺은 관계를 망치지 않고 성장시키며 틀어진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역량이 생긴다. 진짜 해피엔딩은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따로 가든 같이 있든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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