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에게서 배우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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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한 편씩은 칼럼을 써야겠다는 나름의 작정은 한동안 몇 가지 핑계로 인해 지켜지지 않았다. 그 중의 한 가지 핑계는 반려동물에 있다. 나 자신이 얼마나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인지를 잠시 잊고 덜컥 고양이를 입양한 것이다. 어땠냐고? 당연히 예상치 못한 수많은 난관을 만났다.
어릴 때 마당에서 기르던 강아지와는 책임도 의무도 없이 내가 내킬 때 놀면 그만이었다. 그랬기에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새로운 반려동물을 맞이하는 것의 무게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는 것은 무리였을 수도 있다.
소박하게 살자는 내 바람을 담아 ‘소박이’라고 이름 지은 어린 고양이는 울며 겨자먹기로 입양에 동의한 남편에게는 천덕꾸러기에 ‘이상하고 정신 나간’ 녀석일 뿐이었다. 좋을 때도 싫을 때도 물고 할퀴는 것으로 반응하며 가구를 긁어대거나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이 낯선 생명체에 대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우리들의 지식과 상식은 쓸모가 없었다.
아이들의 다리에 소박이의 발톱이 스치며 피를 보던 어느 날, 더 이상은 도저히 못 키우겠다며 받은 곳에 다시 주라는 남편의 표정은 단호했다. 생후 3개월의 아무것도 모르고 천방지축인 소박이는 먹는 것과 자신의 안전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보였고 그런 모습이 더 측은했다. 우리가족과 소박이의 문제로 고민하던 나에게 지인들이 준 조언은 이름 때문에 소박맞게 생겼다는 것이다. 앗, 소박하게 살려고 했을 뿐인데...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는 아니다.
고양이를 보낼 다른 입양처를 알아보는 도중 식구들 의견을 모아 일단 이름을 ‘단비’로 바꿨다. 다시 시간이 몇 주 흐르고 그 사이 남편의 마음은 점차 바뀌어 갔다. 단비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고 자라면서 뛰는 것도 조금씩 줄었으며 가족들 역시 고양이라는 동물에 대해 차차 이해해 가면서 어느새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남편은 창밖을 응시하는 단비를 보면서 철학자 같다며 신기해하기도 했고 “단비, 뽀뽀!”하면 주둥이를 쭉 내밀어 입을 맞추는 녀석을 누구보다 예뻐하기 시작했다. 남편 스스로 아이가 되어 함께 놀았고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생겼냐”며 감탄하기도 했다. 솔직히 예쁜 고양이는 아니지만 자신의 눈에는 어떤 고양이보다 예쁘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는 예절이니 장래를 염두에 두느라 혼내거나 잔소리도 많던 꼰대 같던 남편이 단비를 대할 때는 세상에 하나뿐인 단비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고양이와 동거하며 힘들었던 것은 우리가 고양이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개나 어린 아이들처럼 훈련과 교육을 통해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그런데 단비는 인간과는 물론이고 개와도 정말이지 다른 존재였으며 다른 고양이와도 달랐다. 단비는 자신의 감정에 정말 충실했다. 제 딴에는 참아주는 것도 보이지 않게 있었겠지만 싫은 것을 억지로 한다는 건 없었고 훈련을 할수록 나의 실망도 커져갔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단비는 남편을 가장 좋아한다. 자신의 대소변을 치우고 밥을 챙겨주고 발톱을 깎거나 털을 빗겨주는 나를 제일 좋아할거라고 생각했던 건 역시 내 착각이었다. 그것보다 훨씬 단비에게 중요한 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뜯어고치려하거나 인간의 편의에 따라 통제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허용해주는 것 말이다.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말한 분석심리학자 로버트 존슨은 사랑은 상대가 그대로 존재하도록 두는 것임에 반해 권력은 힘을 이용해서 상대를 통제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양이에게 훈련을 시키려했던 나의 시도가 우습게 끝이 난 후, 서로를 좀 더 알게 되면서 고양이 단비는 우리 가족에게 점차 촉촉한 단비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 남편에게 조건없이 사랑을 줄 대상이 되어주고 아이들에게는 낯선 대상과 공존하는 법을 배울 기회를 주고 있으며 나에게는 나 자신이 불안할 때 얼마나 통제하고 싶어하는지 조건적인 애정에 익숙한 사람인지 깨닫게 하는 스승이 되어주면서 말이다.
단비는 나에게 예쁨을 받기 위해 억지로 자신을 꾸미지 않고 늘 자신이 중심이다. 그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네가 나를 사랑하건 말건 나는 나대로 괜찮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다 가끔 기분이 좋을 때는 나를 보며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뜨며 일명 ‘고양이 키스’를 날린다. 그럴 땐 또 나의 서툰 사랑을 조금은 느끼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뭉클하기도 하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나는 단비의 마음을 조금은 얻은 듯하다. 아직 채 한 살도 되지 않은 조그만 반려동물에게서 스스로 우월한 종족이라고 자부하는 인간인 그리고 중년의 내가 배운다, 아직도 의문투성이인 사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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