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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졌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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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서영심리상담센터
댓글 0건 조회 19회 작성일 25-02-0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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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벌이로 사는 것이 당최 어려운 요즘이다. 그러니 당연히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고 보육기관에 자리를 얻는 것만큼이나 그 기관이 제대로 된 돌봄을 주는지 믿기도 점점 더 어려워진다. 어쩔 수 없이 아이의 늙어가는 조부모께 도움을 청하게 된다. 그밖에도 가정이 깨지거나 부모의 질병 등 아이를 돌볼 수 없는 다양한 부모의 사정에 따라 아이는 이리 저리 맡겨진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이른바 ‘맡겨졌던 아이들’은 그 세월에 어떤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을까? 맡겨졌을 당시의 연령과 기본적인 정서적 상태, 새로운 환경의 질, 그리고 아이에게 보내준 정서적 보살핌 정도에 따라 그 영향은 천차만별이 된다.



며칠 밤 가면 올 거야. 널 미워해서가 아니야

바쁜 일 지나면 얼른 올게, 그땐 집으로 가자.


할머니 손잡고 가볼까, 큰 나무가 있는 시골집

새벽 첫차 타고 시장도 가보고, 언덕너머 숲에도 가보렴.


(중략)


흙먼지 날리는 길 위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오늘 자고 나면 내일은 올 거야, 나를 데리러 올 거야.


음 바람이 불어 구름 밀려나가고 텅 빈 하늘 위엔

집으로 가는 새들이 지나고. 산 그림자 길어지는 저녁이 오면 엄마의 노래가 그리워

눈물참고 돌아오는 도랑 길옆에다 심술 부려 날려본 꽃잎.



싱어송 라이터 정밀아의 노래 <심술꽃잎>에서 ‘널 미워해서가 아니야’라며 맡기고 간 부모는 그래도 아이의 심정을 어렴풋이 이해한 축에 드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세대에게서 그런 세심함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며칠, 아니면 ‘몇 달’에 불과한 단기간이었겠지만 아이들에게 그 시간은 물리적으로 잴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그것은 ‘버려짐’으로 경험될 수 있다. 흔히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을 심리학에서 ‘유기불안’이라고 따로 칭하는 이유는 그만큼 그런 불안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고 그 영향 또한 우리에게 적지 않음을 말해준다.


부모가 이혼하면서 수년간 보육원에 맡겨졌던 내담자가 떠오른다. 다행히 그의 주양육자는 형편이 나아지면서 그를 다시 집에 데려와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관계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늘 자리했다. 배우자와 배우자의 원가족은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한 마음인 듯이 보였고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한 느낌 때문에 괴로웠다. 직장에서 일은 잘 했지만 소외당하는 듯한 느낌 때문에 동료들의 눈치를 보느라 언제나 피곤했다.


아직 독립된 자아를 갖고 있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자신의 인격을 대신하는 존재이기에 주양육자가 곁에 있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과 같다. 그 말은 양육자의 부재가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을 넘어서게 되면 자기 존재의 항상성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글은 무심했거나 무책임했다고 부모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가족 간에 알고 한 일이건 모르고 한 일이건, 크든 작든 이런 ‘버림’을 받을 수도 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영향이 생각보다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억을 괴롭다고 묻어두는 것은 사안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그런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기회를 놓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자기 존재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힘들어지면 외부세계에 대한 안정감을 갖기 어렵고 근원적인 차원에서의 세상과 자신에 대한 신뢰감이 확보되지 않아서 세상으로 나아가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동기에는 가능하면 주양육자가 안정된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기를 권하고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이 삶에서 벌어졌다면 어쩔 것인가. 그것을 가지고 평생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살 이유는 없다. ‘그 이면의 의미를 왜 고통 받은 내가 찾아야하나’하는 볼멘소리가 속 깊은데서 훅 하고 올라오긴 하겠지만 ‘내’가 아니면 그걸 대신 찾아줄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누군가를 원망하며 살지, 자신의 아픔의 목적을 찾기로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내담자는 상담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신뢰감을 조금씩 찾아가면서 자기주장도 하게 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종결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담자가 개인사의 목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상담조차 지속하기 어려운 경우를 종종 본다. 맡겨졌던 경험이 길거나 그 기간 동안 학대가 있었거나 그 일이 일어났던 때가 어리면 어릴수록 말이다. 또다시 버림받거나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 불안 때문에 자신이 먼저 떠날 핑계를 만든다. 또 어쩌면 현재의 고통이 미워해왔던 누구의 탓만이 아님을 인정하기 싫은 것일 수도 있다. 그 혼란과 두려움은 누구도 쉽게 견디기 힘드니 말이다.


‘버려짐’은 독립의 전제조건이다. 민담과 신화의 주인공들, ‘콩쥐’, ‘바리공주’, ‘백설공주’, ‘신데렐라’, ‘헤라클레스’의 공통점은 부모가 죽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버려진 후, 수많은 난관을 헤쳐 가며 자기만의 삶을 찾아나서는 영웅의 길을 가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독립의 길이다.


우리 모두는 부모의 기대나 바람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와 별개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고유한 존재이다. 각자가 품고 살아갈 영웅드라마의 완성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자기 삶이 어떤 불운한 과거로 망쳐졌던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무엇인가를 이뤄내라는 목적으로 볼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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