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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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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서영심리상담센터
댓글 0건 조회 20회 작성일 25-02-0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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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남편은 절대 마초스타일은 아닌 듯 보였고 그 자신도 마초들과는 다른 종족인 듯 금 그으며 자부심을 드러내곤 했다. 일명 자타공인 ‘개념남’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가사노동 참여도에 대해 큰 불만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한국에서 이정도면 훌륭한 거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남편의 안식년 기간 중, 바깥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여자는 싱크대에 수북이 쌓인 그릇을 보는 것이 점차 쉽지 않아지더라고 했다. 종일 집에 있던 남편이 그 실망을 눈치 챈 날에는 좀 있다가 설거지를 해준다고 해도 그 말을 언제 실행에 옮길지 미덥지가 않았고 지금 당장 부엌의 카오스 상태를 해결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업보 같은 좌절이 밀려왔다. 그 순간 ‘설거지 좀 해줘’라고 말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몇 십 년 간 일하느라 고생했으니 좀 늘어져있어도 되는 거라고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쓸데없는 이해심이 자신의 감정을 방해했다. 이해심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럼에도 감정의 소리는 그녀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이해심은 그러니까 외부에서 교육된 내용이다. ‘그동안 고생한 사람에게 쉼을 주는 것이 현명한 여성이다’라는.


그녀는 그녀 안에서 올라오는 불편함을 외면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당위에 더 무게를 두었다. 물론 거기에는 현명한 여성이 되어야한다는 자신만의 가치관이 작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현명한 여성이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까지는 그녀가 한 번도 의식화해보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그 모든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면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서 가족들을 미움의 눈으로 볼 필요도 없었겠지만 그러기엔 그녀는 보통 여자다. 집에서 뒹구는 인간 베짱이들이 눈에 띄면 합리적인 이성도 가족에 대한 애정도 발동하지가 않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건 이미 뭔가가 안에서 올라와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집안일이 그녀의 순서대로 되어야한다는 나름의 원칙이 깨져버린 것에 대한 분노가 있는지도 모른다. 살림을 해 본 사람이라면 주방에 나름의 질서가 있어서 그것이 흐트러지면 우주의 질서가 무너진 듯 괴로워하지만 사실 그 순간 깨지고 무너진 것은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신념일 수도 있다.


“가족들은 늘 그러죠. ‘도와달라고 말하라’고..”

그러나 그 실망감은 너무나 익숙하고 그만큼의 좌절 또한 새롭지 않다

그래서 그녀는 다소 자폐적인 상태가 되어 다음 수순을 밟게 되더라고 했다. 함구하며 큰 소리를 뚱땅거리는 설거지소리로 자신의 좌절을 티내기로. 물론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그러다 친구와 통화하며 그동안 그녀로 인해 서운했던 마음을 쏟아내는 친구의 속내를 듣게 되었다. “그동안 전화 한 통 없이 어쩜 그리 무심하냐!”. 최근 엄청 힘든 일을 겪은 절친이다.

여자는 너무나 이성적인 목소리로 친구의 속상해하는 마음을 받아쳤다. “말하지 그랬어. 전화 좀 하라고.” 그런데 말하면서 이 말투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건데 싶다. 여자는 자신이 남편처럼 말하고 있는 걸 알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친구의 섭섭해 하는 목소리 속에서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한다. “전화하라고 하는 게 어디 쉽니? 너도 이런 저런 일로 힘들 거 같은데 나까지 돌보라고 어떻게 해.” 그리고 덧붙인다. “그래도 나라면 매일 전화해서 밥은 먹었냐 힘들진 않냐고 했을텐데.”


우리는 왜 상대가 나와 같은 마음이 되지 않는 것을 서운해 할까? 왜 나처럼 생각하지 않느냐고 원망하고 당연히 이렇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렇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걸까?


인간의 신체기관으로서 입의 여러 용도 중, 의사표현의 기능은 인간다움의 백미일테고 의사표현은 너무나 쉬운 일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러 이유로 말을 하지 않거나 하지 못한다. 침묵은 갈등을 피하려는 자기방어에서 기인할 것이다. 즉 실질적인 외적 압력이 두려움으로 작용하게 되는 경우이거나 내재해 있는 갈등구조가 자극되어 이를 피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처리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함구의 방식은 당장의 갈등은 피할 수 있겠지만 만족스러운 삶과는 사뭇 다른 방향의 선택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내 아픔 아시는 당신’에 대한 희구는 우리들에게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듯하다. 그런 바람은 너무나 마술적이고 강력하다. 언젠가 서정적인 멜로디에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고 노래하며 등장했던 과자 광고가 기억난다. 내 눈에는 그 광고가 우리의 보편적인 바람을 영상과 노랫말로 형상화 한 듯했고 그랬기에 우리를 강력하게 사로잡았던 건 아닐까 싶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경우가 더 이상하다. 내 맘을 나도 잘 모르는데 상대의 마음까지 예측해야 한다는 건 일종의 독심술의 경지 아닌가.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지 그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게 내버려두길 원하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자신에게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지는 표현해야 알 수 있고, 때로는 말해도 못 알아듣는 경우조차 허다하다. 그러니 분명하고 확실하게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번에 걸쳐서 자신이 원하는 걸 말해야 할 수도 있다.


상담실에서는 그런 염원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상담자는 내담자의 말에만 의존해서 그를 이해하지는 않는다. 오감을 동원해서 그를 살펴야 하니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되기는 한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듯 보이는 상담자는 쉽게 평가절하된다. 그런데 이런 것이 신에 대한 바람에 준하는 엄청난 요청이라는 것을 알지는 못한다. 또한 이는 상대에 대한 동일시에서 나오는 현상이기도 하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임에도 상대와 내가 개별적인 존재라는 것을 얼마나 염두에 두는지. 특히나 일심동체이길 바라는 가족에게서 더 많은 실망과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가족 간에는 너무나 쉽게 동일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개별자로서의 가족 개개인을 보지 못해온 대가이기도 하다.


그녀가 ‘(지혜의 여신처럼) 늘 현명해야할 필요는 없다’ 는 마음으로 여유를 갖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현명한 삶을 살지 않을까? 남편의 휴식과 자신의 요구는 둘 다 각각의 타당함이 있고 서로 충돌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가 그저 인간적인 감정과 요구에 대해 말한다면 말이다. “나 힘든데 설거지 좀 해줄래?”라고 말이다. 그녀가 남편을 마치 한 번 입력시키면 자동 실행되는 AI로봇처럼 여기지 않는다면 남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 때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신도 동물도 인공지능로봇도 아닌 <한 인간으로 자기답게 살기>. 사실은 이것이 제일 어려운 수행이라는 것을 아는 한 사람으로서, 그럼에도 그녀에게 그 어려운 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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