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시기심에 대해 말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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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게 비유적인 표현만은 아닌가 보다. 정말 배가 아프다. 그 ‘배’가 위장인지 간이나 쓸개인지, 아니면 명치인지 정확한 부위는 알 수 없지만, 시기심을 제대로 느낄 때 그것은 몸으로 자각되기도 한다.
영화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에 등장하는 브래드씨도 시기심으로 신체적 고통을 느꼈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잘나가는 대학 동창들의 화려한 생활을 TV와 잡지에서 본 후 자신의 생활에 도통 집중하지 못한다. 머릿속에는 그 동창들이 누리고 있는 빛나는 삶의 단면이 상상의 나래를 덧붙여 펼쳐지고 그럴수록 나름 소신껏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자신의 인생은 시시하고 초라해 보일 뿐이다. 결국 사랑하는 가족마저 ‘실패한 삶’의 원인 제공자들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시기심은 파괴적이다. 시기의 대상을 쓰러뜨리려는 비뚤어진 욕망으로 들끓게 만든다. 상대의 사소한 흠을 과장해 음해하려 하지만 결국 시기심에 떠는 자신까지 무너뜨리고 만다. 오죽하면 중세인들이 시기심을 교만 다음으로 심각한 죄악으로 간주했을까.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은 시기심을 ‘대상이 탐나는 무언가를 소유하고 즐기는 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라고 했다. 덧붙여 시기하는 사람은 ‘대상이 가진 것을 빼앗거나 훼손함으로써 대상이 비참해지는 것을 보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라고 보았다. 무서운 표현이다.
‘들장미 소녀’ 캔디를 미워했던 이라이자, 그리고 모차르트를 시기했던 살리에르가 그랬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SKY캐슬의 섬뜩한 코디네이터 김주영 역시 마찬가지다. 밝고 긍정적인 성격 덕분에 남자아이들의 관심을 독차지한 캔디를 괴롭히는 이라이자, 작곡과 연주를 너무도 쉽게 해내는 모차르트 앞에서 자신의 ‘노력’을 ‘재능 없음’과 동의어로 느끼게 되는 살리에르, 천재 소리를 듣던 아이를 사고로 망치고 나서 명석한 자녀를 가진 ‘캐슬가’를 무너뜨리기로 작정한 김주영, 이들은 모두 시기심의 포로였다.
시기심의 배경에는 상대가 가진 것이 내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나는 원래 우월한 사람인데 상대가 가진 그것을 못 가졌다는 이유로 열등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태에 화가 난다는 것이다. 시기 대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능력이나 재력일 수도 있지만, 성품이나 외모가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자신에게 없다고 느끼는 그 무언가이다.
브래드씨는 비영리단체에서 헌신하며 이타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확신이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이라이자의 우월감은 그녀의 부모가 가진 재산이었을 테고, 살리에르는 엄청난 노력과 성실함으로 쌓아 올린 그 분야 일인자라는 평판이 삶의 동아줄이었을 것이다. 김주영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관리하는 학생을 최고로 만들 수도, 그 가정을 풍비박산 낼 수 있다는 망상에 가까운 전능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캐슬에 사는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것을 빼앗아야만 충족되는 만족감이었다.
간혹 내담자들이 자신이 가진 시기심을 고백할 때, 그런 자신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그러나 시기심은 그 자체로는 악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그저 인간적인 감정 중의 하나일 뿐이다. 크건 작건 우리는 살면서 시기하는 감정과 마주치게 된다.
자신의 시기심을 알아차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 정도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브래드씨는 자신의 시기심을 추적한다. 그 감정을 외면하거나 덮으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정면으로 들여다본다. 물론 젊은 여대생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잠시 미화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솔직하게 내면의 갈등을 털어놓는다. 자신을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젊은 이상주의자의 실망에 찬 표정을 감당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보기 싫어한다. 시기심에 직면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상대를 ‘후진’ 인간으로 규정하고 나서야 살 것 같아진다. 그런데 후진 면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문제다. 혹시나 그런 흠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대상이 나빠서 미운 것이 아니다. 미움은 시기심이라는 안경을 낀 채 상대를 볼 때 생긴다. 어쩌면 상대가 그렇게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시기심이 생기는 것은 자신이나 상대가 악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기심은 자기 자신을 성취로 저울질하고 자신의 존재 자체는 거부하며 괴롭혀왔던 오랜 습관이 만들어낸 감정인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성취로 평가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현재의 모습을 부족한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완벽하지 않은 모습이지만 어제보다는 나아지고 있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기심과 열등감이 지금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면 그 감정을 없애려 할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살피는 과정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대상을 뺏고 빼앗기는 식의 경쟁자로 보기보다 그 자체로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나 자신의 문제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 경쟁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 오롯한 나 자신의 마음 깊은 곳, 그곳의 바람과 열망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뜻이다.
브래드씨는 자신의 시기심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와도 같은 동창과 화해를 시도했지만 그와의 만남에서 그 세계의 허상을 제대로 맛보고는 자신의 삶을 껴안는다. 대단할 것까진 없지만 진짜 삶인 것, 지금 현실에서 함께 하는 것의 가치를 진심으로 느끼게 되면서 그는 말한다. “소유할 순 없지만 사랑할 순 있다. 그것이 세상이건 사람이건”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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