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지 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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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실을 찾는 연령층은 매우 다양하지만 한국의 경우 대부분 그 상한선이 현재로서는 50대까지인 듯하다. 그보다 나이가 든 세대에게는 무형의 것에 지불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 보인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던 세대였기 때문에 생존문제 이외의 어려움은 그저 견디고 참으면 된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리라. 상담을 받는다고 당장 먹을 것이 생기지도 않고 상담과정이 외과수술처럼 가시적인 것도 아니니, 보장되지 않은 과정에 시간과 비용을 들이기가 내키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그런 문턱을 넘어 방문했던 한 노인 내담자가 있었다. 아마 자발적으로 우리 센터의 상담실을 찾은 내담자들 중에서 최고령이었을 것이다. 원래 나이보다 십 년 이상 젊어 보이는 그는 역시나 자신의 삶도 젊게 운영하고 있었다. 아내와도 정서적 소통이 잘 되는 사이인데다가 은퇴 후 연금 생활을 하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었다. 각종 문화예술을 향유하며 주변인들이 자신을 얼마나 ‘재미있고 유쾌하고 모르는 게 없는 사람’으로 보는지를 자랑한다. 그의 표정에는 자신이 즐기는 문화와 교양 수준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지 현재의 어려움은 아내의 의부증이라고 했다.
그는 상담에서 제공되어야 하는 것을 먼저 말하며 상담을 주도하고 싶어 했다. 본인은 문제가 없다며 가끔 악몽을 꾸지만 개 꿈 일 거라며 의미를 축소했다. 본인은 정상이니 자신을 의심하는 아내를 중심으로 상담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오리엔테이션을 상담자에게 주기 위해 아내보다 먼저 찾은 것임을 몇 차례나 반복해서 언급했다. 자신이 다른 여성을 몇 차례 만난 것은 아무 ‘의미 없는 만남’이었는데 그렇게 큰 상처를 받을 줄 몰랐다며 여러 번 사과했음에도 전처럼 자신을 대하지 않는 아내를 원망했다. 모처럼 상담실을 찾았지만 자기 인식에 대한 욕구는 전혀 없었다. ‘문제없는 나’를 의심하는 ‘문제 있는 아내’를 고치고 싶을 뿐이었다.
심리상담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탐색하고 인식하는 작업이다. 아무리 타인에 비해 무난하게 살아왔을지라도 언젠가는 누구라도 난관에 봉착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본인의 삶에서 펼쳐지는 상황들은 자신이 먹어서 소화해야 하는 음식과 같다. 그는 여러모로 안정적인 생활기반을 가지고 있는 반면, 너무나 외향적으로 살아왔기에 자신의 내적인 면모를 통찰한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호기심도 문제의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 타인을 의식하고 사회적 기대에 맞춰온 모습만 있지,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인식하고 그것을 이해하려 시도하지는 못했을 수 있다. 지금도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설정해놓고 살아오다가 그것이 깨질 위기에 놓여있는데 그 탓을 아내에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리적 독립은 자기 행위의 결과는 물론 동기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책임지는 것이다. 외적인 삶에서는 만족할만한 성취를 이뤘고 아내와도 사이좋게 해로하며 살아왔다고 해서 그 여성과의 만남이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의미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가 의미를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이런 일이 발생해서 수십 년을 함께 의지하던 부부사이를 흔들었던 것에는 어떤 이유와 목적이 있다.
이것은 정말 불행일까, 아니면 기회일까?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 머피는 불운을 상징하는 머피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빠를 원망하며 살았다. 그러나 아빠는 머피를 달래며 말한다. 머피의 법칙은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뜻”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이번 사건은 이 노부부의 관계의 질에 새로운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에게는 그의 부정적인 측면을 알아차리라는 요청으로 생긴 사건인지도 모른다. 그런 차원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은 아닐까?
오랜 삶의 경험과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 대해 하나의 측면밖에 보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밝고 멋진 측면뿐이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밝은 면뿐만이 아니라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 남들에게 보이기 싫은 자신의 ‘그림자’ 측면인 부정적인 특성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스스로가 초라해지고 그동안의 삶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격이 더욱 확장되어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만족스러운 마음상태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는 사건은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금슬이 유난히 좋았던 사이였기에 아내는 이 상황이 더욱 고통스러울 수 있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했을 수 있다. 그랬기에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나의 삶에 무엇이 남았나?’라는 허무와 좌절을 남편을 공격하며 해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어떻게 자기만의 삶을 살지에 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노년기에도 심리적 독립이 필요하다. 어쩌면 가장 절실한 때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로운 만남보다는 익숙한 것들과 헤어지는 일들이 더 많아진다. 이것을 독립에의 압박이 사방에서 조여 오는 것으로 인식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졸혼이니 황혼 이혼이니 하는 시대의 변화가 제대로 된 홀로서기로 가기 전 단계가 된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진짜 독립은 물리적인 상태 그 이상이며 심리적 독립의 전제조건은 ‘버림받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 성숙한 관계는 홀로 선 서로 다른 두 개체의 만남이어야 가능하다. 그런 만남이 아니었다면 지금부터라도 다름을 확인하는 수많은 갈등을 기꺼운 마음으로 직접 겪어가는 것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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