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풀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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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코넬대학의 더닝과 크루거는 1999년 연구에서 ‘능력 없는 사람은 환영적 우월감으로 자신의 능력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고,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지편향을 보인다’고 했다. 그 연구를 나 자신에게 대입해보면 수긍이 간다. 초보 상담사 시절의 오만했던 내 모습이 딱 그랬다. 열정 말고는 가진 게 없던 시절이었음에도 막연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영화 <크게 될 놈>에서 주인공 기강은 자신의 어리석었던 과거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가진 것도 해 놓은 것도 없으면서 언젠가 내가 크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스웠습니다.” 기강은 폭력적인 아버지 슬하에서 두려움에 떨며 성장하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멋대로 산다. 크고 작은 사고를 칠 때마다 동네 어른은 딱한 마음에 “기죽지 마라. 너는 언젠가 크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
잘못한 아이를 격려하는 이 장면은 어쩌면 훈훈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강의 회고를 통해 우리는 아이들 기를 북돋우겠다며 쉽게 던지는 과한 칭찬이 아이의 마음에 허황한 기대를 심어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자존감을 높여준다는 것을 빌미로 ‘자아 팽창(Inflation)’ 상태가 유지되도록 풀무질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아이가 팽창상태로 태어난다고 본다. 마치 낙원에서 신과 일체화된 상태처럼 무의식의 자궁에서 아직 분리되지 않은 자아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다 세상에서 겪는 좌절을 통해 현실을 깨닫고 성인기의 삶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때부터는 근원적인 팽창은 해체되고 자아를 중심으로 자신의 의지력을 발휘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이는 매우 간단한 일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좌절을 딛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좌절할 때 오히려 스스로를 더 부풀림으로써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한다. 에딘저(E. Edinger)는 그의 책 <자아 발달과 원형>에서 지나친 교만과 겸손, 권력투쟁뿐만 아니라 지나친 사랑과 이타심까지도 팽창의 증상이라고 강조했다. 팽창된 사람들은 자신을 특별히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현실의 허접스러운 일들을 한 단계씩 밟아 나가는 것은 지루하고 견디기 힘들다고 여긴다. 차라리 언젠가 ‘한 방’을 통해 자신의 대단함을 입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당연히 해야 할 일도 ‘시시하다’라는 핑계로 자꾸 미루게 되는 것이다.
내가 상담했던 청소년 A는 보호자의 수입이 너무 적어서 늘 자신이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초조하다고 했다. 그 나이에 벌기 어려운 큰돈을 꼼수를 써서 벌었지만 씀씀이가 더 컸다. 왜 매번 택시를 타느냐고 묻자 “그럼 버스를 타요?”하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는 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A는 머리 좋은 영특한 아이였지만 가정불화로 이곳저곳 맡겨지는 통에 아동기의 성장 과정이 너무 불안정했다. 예측할 수 없는 생활 속에서 아이는 불안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대신 심리적인 팽창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다. 내면은 늘 초라했고 열등감에 시달렸기 때문에 자존심 유지를 위해 명품 옷과 신발을 갖추려 했다. 많은 돈을 쉽게 벌고 싶었으므로 시급을 받는 ‘알바 따위’는 할 수 없었다. 결국,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일을 했고 그렇게 번 돈을 ‘폼 나는’ 이미지 유지에 다 써버렸다.
팽창된 자아는 다른 상황에서는 위축되기 쉽다.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보상적인 처치의 결과가 팽창이기 때문이다. 열등감 문제는 물질 위주의 경쟁 사회에서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인간의 존귀함에는 등급을 매길 수 없지만 우리는 그 기준을 이미 내면에 장착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짧지 않은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온 B씨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심리검사를 마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나를 지탱하게 해줬던 것 같아요. 그런데 검사를 받으면서 평가받는다는 게 불안하니까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싶으니까 ‘멘붕’이 왔어요. 내가 모순에 찬 위선 덩어리더라고요.”
B씨는 그렇게 말한 후 더는 상담에 나타나지 않았다.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버티게 했던 팽창상태는 상황이 변하자 또 다른 방식으로 은밀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남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잠시 보게 되었던 것 같다. 필요한 것은 자신을 그저 나약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질 못했다. 그래서 거품을 걷어낸 자기 모습을 직면했을 때 수치심과 모멸감에 사로잡혔다.
고통으로 점철된 내담자의 개인사를 듣는 것은 심리 상담사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상담하는 동안 가슴 아프고 두렵기도 한 감정을 종종 경험하기도 한다. 초보 시절의 나도 팽창된 자아 덕분에 그런 순간을 그나마 감당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내담자들 역시 버려진 것처럼 내팽개쳐진 힘든 나날을 자신을 부풀려서 겨우 버텨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이제는 그런 자신을 돌아볼 때이다.
물질 중심의 가치관과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는 인간의 내면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어쩌면 B씨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상담을 중단한 것은 내면의 위축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고 거품이 걷히고 난 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후자라면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모습이 아니라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한 삶의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을 의식해서 ‘대단한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자기모순의 끊임없는 발견이야말로 팽창도 위축도 아닌 중간지대를 나로 사는 방법이다. 위대한 이상을 품은 채로 진흙탕을 뒹구는 모순에 찬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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