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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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잔뜩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순진하고 소심한 주인공 소녀 ‘선이’는 살아남기의 각축장인 초등학교 교실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은따’의 생활을 맥없이 보낸다. 그러다가 여름 방학식 날 다른 학교에서 전학 온 ‘재희’와 어울리며 단짝 친구가 된다. 서로의 부족함과 허물을 탓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 주던 둘의 관계는 ‘보라’라는 지배성이 강한 아이와 재희가 가까워지면서 파국을 맞는다. 상담실에서 보라와 같은 이들의 희생자를 만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보라' 같은 아이들에게 찍히면 학교생활이 지옥으로 변하는 것을 알기에 몸을 사리게 된다. 총도 지뢰도 없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은 벌써 사활을 건 살아남기 예습을 한다.
보라에게 상처받고 외톨이 신세였던 선이는 친구가 된 줄 알았던 재희의 변심으로 또다시 충격과 좌절을 겪으면서 변한다. 할 말 못하고 물러서기만 하던 선이는 맞서서 자신을 방어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나한테 왜 그러냐?”고 억울했던 심정도 토로하고, 당했던 만큼 상대의 아픈 부분을 까발리더니 한 대를 맞으면 한 대로 돌려주기도 한다. 이제 더 이상 어리바리 ‘선이’가 아니다. 마치 선이의 시선은 재희를 향해 ‘나와 친구였던 것을 설마 잊은 건 아니지?’라고 묻는 듯하다.
어떻게 선이는 전과 다르게 행동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노는 동안 진심으로 서로 통했고 그래서 정말 둘에게 ‘친구’였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정당한 한 방을 내리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했기에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놀기 위해’ 친구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건 피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주체의 입장이다. 이 영화가 나에게 돋보였던 점은 자아가 어떻게 주체적으로 변해가는지를 현실감 있게 그려줬기 때문이다.
둘의 갈등이 안쓰럽게 이어지던 어느 날, 선이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돌파구가 찾아온다, 같이 노는 친구에게 툭하면 맞고 오는 어린 동생에게 때리는 친구와 놀지 말라고, 속이 상한 누나 선이는 한마디 한다. 동생은 자랑스럽게 나도 때렸다고 그 다음에 맞은 거라고 한다. 흥분한 얼굴로 그럼 다시 때렸어야 한다는 누나에게 “그럼 언제 놀아?”라고 순진한 눈망울을 한 동생은 되묻는다. 그 말은 어떤 위인의 어록이나 경전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강력한 한 방이다. 그동안 아무도 해결해주지 못하던 어려운 문제를 꼬맹이 동생이 순식간에 풀어줄 줄을 누가 알았을까. 물론 이 명언을 듣고 제대로 알아듣고 소화해서 내 삶에 실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지만 말이다.
장면은 다시 학교다. 주인공은 늘 중심에서 빛나던 친구 재희가 피구 라인 밖에서 갈 곳 잃은 시선으로 서성이는 모습에서 또 다른 자신을 본다. 그러다 어렵게 친구들 속으로 들어간 재희가 선을 밟았다며 나가기를 외치는 애들 앞에서 “재희 금 안 밟았다, 내가 다 봤다”며 편을 들어본다. 내 편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건 얼마나 살 맛이 나게 하는지. 옳고 그름의 문제 너머에 이들의 정의가 있다. 영화는 상처받은 선이, 재희, 보라를 돌아가며 보여주면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도식을 넘어서 상처를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우리 인생의 일부분임을 쓸쓸하게 직면시켜준다.
이제 이 둘은 서로를 다시 바라본다. ‘본다’는 건 이미 ‘연결되는 것’의 시작이다. 상처를 준 사람을 우리는 쳐다보지 못한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시선을 돌린다. 그런 둘이 노려봄이 아니라 바라본다는 건 뭔가가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대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직 내게 남아 있지만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건 회복의 기미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사랑이니 용서니 하는 말보다, 자신의 절실함 때문에 먼저 손을 내민다. 그것은 ‘놀고 싶다’이고 그 뜻은 ‘살고 싶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놀이하는 인간 homo ludens’이라서 놀며 자신을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그 속에 치유와 성장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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