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와 ‘사랑’
페이지 정보

본문
"감자 밭에 원수는 무당벌레가 원수요
이내 몸의 원수는 시애비 아들이 원수라"
얼마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이 노래의 가사를 듣고는 귀를 의심했다. <고래야>라는 국악밴드가 함경도 민요를 현대적 감각으로 리뉴얼해서 부른 곡이다. 그다음 구절을 보자.
"우리 집에 시어머니 염치도 좋지
저 잘난 걸 낳아놓고 날 데려왔나
날 데려 왔걸랑은 볶지를 말던가
요리 볶고 조리 볶고 콩 볶듯 하네"
시집살이에 꽤나 고달팠을 시골 며느리의 애환이 그려진다. 남의 집에 시집와서 겪는 마음고생 몸고생에 대한 묘사와 담긴 정서가 보편적 공감을 불러일으켰기에 민요로 불려 왔을 것이다. 우리 여성조상들의 꾸밈없는 표현력과 유머감각이 감탄스럽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후렴구에 흘러나오는 반복되는 아래의 구절이다.
"어랑 어랑 어허야 어람마 디어라
모두 다 내 사랑이로구나"
본인을 고생시키고 서럽게 한 남편과 시집식구들에 대한 미움을 쏟아내고는 ‘모두 다 내 사랑’이라고 한다. 이 무슨 분열된 태도인가 싶겠지만 이내 수긍이 간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하나뿐이겠는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가족도 떨어져서 살면 단절되어 하나의 감정으로 인식되겠지만 같이 사는 경우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상대에 대한 감정이 뒤집히는 걸 볼 수 있다. 가족은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가장 솔직한 모습을 보이고 살기 때문이다. 마냥 미워하고 지낼 수도 늘 좋을 수만도 없다. 상반된 감정으로 혼란스럽기도하지만 그 혼란을 견디는 것이 성숙의 지표이기도 하다.
어쩌면 한바탕 속 시원히 푸념했기 때문에 모두 사랑이라고 퉁 칠 수도 있는 것이다. 대나무 숲이건 친구건 일기장이건 속풀이를 할 대상이 필요하다. 상대에게 직접 본인의 심정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상대가 어려워서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본인의 가치관 때문에 솔직할 수 없다.
‘모두 다 내 사랑’인 바에야 뒷담화도 하고 앞담화도 하고 소통하며 살아야 본인도 주변도 건강하다. 그에 따르는 결과를 본인이 감당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민요를 부르는 것에도 배움이 있고 상대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것도 발전이다. 물론 무엇보다도 본인의 감정을 살피는 것이 자기 성장의 지름길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 이전글인생의 밑바닥이라고 느낄 때 25.02.04
- 다음글친구들이 나를 버렸다 25.02.0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